(비젼제시), 講演 要請/자녀 경제교육

가나안(Canaan)은 어디에도 없다(Nowhere)

휘파람불며 2009. 3. 10. 02:50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히브리족의 합창’ 공연되었다. 초연된 ’베르디의 <나부코>‘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던 ’이탈리아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히브리족의 합창은, 구약시대에 ’느브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모진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노래로 엮은 것이다.

 

~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 비탈과 언덕에서 날개를 접어라. 그 곳은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 조국의 공기가 향긋한 곳 맞이하라. 요르단 강둑과 무너진 탑,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이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구약시대의 ‘포로 유대인’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있었다.

이 공연으로 절망과 우수에 빠졌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독립과 통일을 염원으로 하는 국민들은 ‘베르디’를 애국적인 우상으로 삼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하층 평민들은 자유를 부러워하였다. 힘든 노동과 풍전등화 같은 생명 속에서도 한 가닥의 희망은, 상상 속에서나마 ‘죽어서 살아 갈 곳’을 마련하였고 그 곳에 아름다운 낙원을 지어 두었다. 영원토록 '젖과 꿀의 가나안 (Canaan)‘이다.

 

누구나 남의 지배받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기를 바란다.

 

‘허생전’에서는 주인 없는 무주공도에 빈층들이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곳이 있다.

무주공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소설 속의 ‘평등한 기회의 땅’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도 바로 Not Place(어디에도 없는 곳)로 이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라로서 왕이 없는 이곳에서는, 정의로움과 지혜, 용기와 절제가 조화를 이룬다.

에레혼(Erewhon)은 Nowhere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역순으로서,

1872년 출판된 ‘사무엘 버틀러(1612~1680)’의 소설 속에서 천민인 양치기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일종의 역유토피아 소설이다.

 

문학의 표현은 자유롭다. 이러한 글들로 선대(先代)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삶 영위에 대한 고통의 대가를 소설 속에서나마 ‘이상향’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대리만족인 것이다.

 

이상향은 Nowhere(어디에도 없다)이다. 그렇다.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