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젼제시), 講演 要請/CanCanCan-2

'여의도 땅' 너나 가져라

휘파람불며 2008. 4. 26. 07:39
 흔히 땅 크기를 말할 때  '여의도의 몇 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의도의 면적은 둑인 윤중제 안쪽의 상업지역과 주거지역만을 포함며 약 2.9㎢(약 87만평)이다.

 

여의도가 모래밭(200~250만평)이었다는 점은 여의도의 이름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은 “여의도(汝矣島)는 옛날에 한자로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洲)라고도 적었는데, 이를 고유어로 풀면 ‘너(나)벌(불)섬’ ‘너섬’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너벌섬은 ‘너른 모래벌판 섬’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한겨레 2005.02.15)

 

여의도 땅을 몽땅 ‘너나 가져라’라고 ‘공짜로 준다.’면 어떻겠는가. 이 땅을 공짜로 받게 되는 사람은 ‘세계적인 갑부로 둔갑 힐 것’에 대해 흥분을 억제하지 못한 순간 심장마비로 생명을 잃지 않겠는가?

 

모래로 이루어진 삼각주(三角洲)인 이 땅은 메말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너나 가져라’라던 쓸모없는 땅으로 그 누구도 가지지 않으려는 땅이었다. 쓸모없었던 땅을 농담 삼아 '너나 가져라'라던 '너의 섬' 즉, '너섬'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화 되어 여의도(汝矣島)로 굳어 졌다.

 

원래의 ‘너섬’은 비가 많이 오면, 현재 국회의사당 부근만 물 밖으로 고개를 내놓고, 모두 잠겨 버린다. 이 ‘너섬’ 옆에는 밤톨만한 형제 섬인 ‘밤섬’이 있었다. 밤섬에는 원래 사람이 살았으나 너섬(여의도) 개발 때, 밤섬의 토사를 옮겨 여의도 윤중제(높이 16m) 안쪽을 메웠으니 형제가 영원히 한 몸이 된 것이다.

 

여의도는 1917년 비행장이 건립되어 한국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귀국해 비행시험을 보인 곳이다. 1945년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이 귀국한 곳도 이곳이다. 1971년까지 군용비행장으로 쓰였다.

 

1968년부터 ‘한강종합개발공사계획’으로 만들어진 ‘여의도’는 도시 현대화의 모델로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1584세대의 대단위 우리나라 최초의 고층 아파트 단지인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준공되었으며 1975년, 태평로(太平路)에 있던 국회의사당이 옮겨왔다.

 

여의도는, 개인 주택이 없는 곳이다. 아파트와 빌딩숲만으로 이루어진 곳,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곳이다. ‘동여의도’는 여의도공원을 중심으로 63빌딩, 증권거래소, MBC,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여의나루역이 있고, ‘서여의도’는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의 당사(黨舍)와 사회단체, 대형교회, 렉싱턴호텔(옛날 맨하탄 호텔),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산업은행, KBS (본관) 등이 자리하고 있어 오늘날의 정치, 경제, 금융, 언론, 방송 등의 허브가 될지 그 누가 예측했을까.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지리적 블루오션’은 여의도(汝矣島)일 것이다.

 

'너도 섬이다.' '너나 가져라' 했던 섬. 모래섬으로 무주공산(주인이 없는 산)이 될 뻔 했던 곳이 한국의 심장으로 변해 있다. 당시의 땅주인은 지금 ‘땅을 치면서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의 일은 변천이 심하다. 밭이 바다가 될 정도이니 홍수로 매몰되었다는 뜻일 게다.

 

여의도 윤중제를 메우게 한 밤섬은 1968년 토사 채취로 사라졌다가 1970년대부터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5년 5만여평, 최근에는 8만여평으로 늘어 해마다 서울의 땅을 넓혀주고 있다. 높이도 해마다 6㎝씩 높아지고 있다.(문화일보 2006.10.17)

이렇게 자라고 있는 ‘밤섬’은, 여의도처럼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뀐다), 고안심곡(高岸深谷:높은 언덕이 무너져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언덕으로 변한다.)에 의해 미래에는 무주공도(無主空島)가 될 염려는 없다.

 

세월은 세상을 몰라볼 정도로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