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젼제시), 講演 要請/CanCanCan-2

나무비(tree rain)

휘파람불며 2006. 9. 10. 09:05
 

누구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으니 동요(童謠)이다.

눈치 없는 연륜(年輪)이 옆을 자나가며 한마디 한다. “넌 이제 ‘어림’을 잃었다. 그러니 동심(童心)을 느끼려면 동요라도 불러라.”라고 부추긴다.

 

이른 새벽 산에 올라 높은 정상에서 내려보면, 낮은 봉우리가 ‘안개 바다’ 사이로, 작은 섬들이 불뚝 불뚝 솟아 있다. 풀잎에 내린 이슬은 바지 가랑이를 적시고 머리 위로는 나무비(tree rain)가 내린다. 숲은, 숲속에서의 비를 더 내리도록 하기도 한다. 새벽 숲속 미세(微細) 물방울 안개는 나뭇잎에서 쉰다.

 

아기 꽃 풀벌레 잠에서 깨어 미소 짓고 신이 난 다람쥐 나뭇가지 흔들어 나무비 춤추네.’ 이 글은 국악동요(國樂童謠) “나무비” 가사 내용 중의 일부분이다.

 

안개 이슬은 나뭇잎에 핵(核 : core)의 주위에 모여 똘똘 물방울로 자란다. 무게를 못이긴 나뭇잎은 방울들을 땅에 내려놓는다. 또한 동요에서처럼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흔들어 투명한 구슬방울들을 땅으로 스며들게 한다. 이를 나무비(tree rain)라고 부른다.

 

동요와 동화는 동심으로 가게 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한다. 하지만, 동요 "나무비" 는 물방울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노래 한 것일 게다. 보이는 작은 부분만을 아름답게 보려했으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보이지않는 부분을 보는 혜안도 때에 따라 필요 할 것이다.

 

숲속 웅덩이에선 개구리도 산다. 풀벌레와 웅덩이 물벌레를 실컷 잡아먹으며 경칩(驚蟄)을 위해 동면(冬眠)을 미리 준비하는 지혜가 있다.

 

풀벌레는 이슬에 젖어 있는 동안에는 움직임이 둔하거나 움직일 수 없다. 체온이 공기의 온도와 같을 때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움직일 수없으니 매순간 위험한 것은 풀벌레다.  자칫 개구리에 잡아먹힐 수 있음이다. 모든 생물은 “낳고 또 낳고”의 연속이고, “죽고 또 죽고”의 지속이다. 어쩌면 “먹고, 죽이고, 먹히고”인지도 모른다.

하늘님께선 인간에게 수명(壽命)을 주시며 그  수명을 관리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자신 관리를 게을리 하면 명대로 살 수 없다고 엄히 타이르셨었다.

 

"핑(ping)이라는 개구리가 연못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연못의 물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말라가고 있다. 다른 생물들은 모두 위기의식 없이 살아가지만, 탁월한 점프 능력을 가진 핑은 말라비틀어진 연못의 진흙탕에 앉아 일주일 고민 끝에 새로운 연못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신나게 길을 간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수백 미터 높이의 나무덩굴에 갇혀 곧 죽게 될 위기를 맞았다. 체념에 빠져 있을 때 지혜가진 부엉이가 나타나 그를 시험한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열망에 가득 차 있던 핑은 그 시험을 통과하고 부엉이는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어주기로 한다.

 

그때부터 새로운 연못으로 가기 위한 혹독한 수련이 시작된다. 매일 뼈를 깎는 듯한 훈련을 받으며, 핑은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기 목표와 비전(vision)은 무엇인지를 느끼며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부엉이는 뛰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개구리 핑에게 무시무시한 과제를 주게 되는데……. "

 

  이 이야기는  “스튜어드 에이버리 골드”가 저술한 핑(ping)이라는 책의 줄거리다.  전혀 다른 삶, 멋진 삶을 향해 도약한 개구리 핑의 이야기이다.

 

당신이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삶은 무엇인가? 

평생을 살면서 세 번의 기회(Chance)가 있다고 한다. ‘변화(Change)를 시도하지 않으면 기회도 없다고 한다.’ 변화의 ‘Change’에서 ‘g’ ‘c’로 바꾸면 ‘Chance’가 된다. 멋진 인생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g’ ‘c’로 바꾼 것처럼 멋진 인생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방관자로서의 삶을 택하든가 아니면 과감히 세상에 뛰어드는 적극적 생을 택할 것인가? (Choice), (Visioning), (Training), (Action) 등의 단어를 떠올려보자.

 

  “한 남자가 살았다. 40세에 죽고 65세에 묻혔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없었으니 40세에 죽고 65세 묻혔다. 하늘은 꿈꾸는 사람을 돕는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수명의 절반도 못 산다. 꿈은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함 미래의 모험일 것이다.

 

- 공기역학적으로 보아 벌은 날 수 없다. 그러나 벌은 그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날 수 있습니다.(에드 포먼) -

우리는 얻어맞고 널브러지고, 수년 동안 아무 것도 얻지 못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그 것이 축복입니다. 다시 일어 설 수 있는(날 수 있는) 기회가 아직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포기기회 준다.

그러나 시작은 힘을  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며 노력에 더 활기를 준다.

사람들은 시작하는데 들인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그만 두는 경향이다. 살아가는 동안의 소망의 크기는 점점 작아 진다.

 

죽을 때까지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그 누구든 삶을 위한 사명이 있다. 자신을 위하든, 남을 위하든, 그 사명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끝 난 것이 아님을 안다. 동심의 세계에 들었다고 사명이 소멸되지는 않는다.

질문을 던져보자. "동요를 듣고 부른다고 젊어지며 사명이 완수 되던가요? " 40에 죽고 65세에 묻힐 건가요?

오늘이,

남은 여생(餘生)의 첫 날것을 아시죠?  

 

 - 재수정 06년 9월 13일 12 : 00